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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돌책격파단] 레미제라블 영화 관람기
    읽다 2021. 9. 18. 12:55

    2012년 영화 레미제라블 개관 후 극장에서 영화 관람을 마친 후 지금까지 남아있는 영화의 이미지는 비바람과 파도의 너울 속에서 갤리선 노역을 하고 있던 장발장과 머리를 싹뚝 잘린 채 거리의 여인역을 맡은 팡틴의 파격적인 연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가 그냥 프랑스혁명 시기였겠거니 여기고 100여년에 걸친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세부 지식을 탐색조차 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 지나간 영화였다.

    5부까지 완독하지 않았지만, 영화 <레미제라블>의 위키검색만 하고 봤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나는 벽돌책을 완파중이니 그 시절 나의 무심함을 용서한다.

    노트북 화면을찍었는데 생각보다 화질이좋다

    1789년 극심한 굶주림과 신분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의 혁명이 시작된 뒤 프랑스는 왕이 없는 나라, 공화정이 들어선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유럽 전역에 번질까봐 주변 왕국들은 방어에 나서고 전쟁과 혼란스러운 혁명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1793년 로베스피에르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2년만에 실각.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빈곤과 혼란속에 빠져든다.

    장발정이 동생과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 시기가 바로 이즈음인 1796년. 그는 빵을 훔쳤을 당시 총을 소지한 명사수라는 이유로 징역 5년형에 처해진다.(특정범죄 가중 처벌) 당시의 범죄자들은 일정 기간 노예가 되어 일하는 노역형에 처해졌는데, 그들 대부분은 지중해 갤리선에 노젓는 일을 하는 수부로 일했다.
    - 영화 첫장면이 이제서야 이해된다.

    영화 레미제라블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으로 취임한 후 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내반혁명 세력을 소탕하고 법전정비, 초등교육 확립 등으로 사회를 안정화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웅이었는데…
    그는 1804년 황제로 즉위한 후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상태임에도 외국과 계속 전쟁을 벌인다.

    ‘아침에 미라보와 함께 했고 점심에 로베스피에르와 뛰었고, 저녁에 나폴레옹과 남은 경주를 뛰었는데’ 밤새 또 뛰라니… 사람들은 지쳐간다.
    1815년  워털루 전쟁을 끝으로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이 해에 장발장은 출소한다.

    이 시기 온건적인 시민왕 루이필립이 집권하여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대열에 가세해 부르주아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 하지만 그들은 부를 나누지 않아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리며 노동을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

    장발장은 마리엘 주교로부터 훔친(주교는 촛대까지 내주었지만) 은식기를 밑천삼아 북해 인근의 도시에 구슬 공장을 설립해 나름의 복지정책을 펼치며 인자한 사장님에서 시장까지 오른다.

    젊은 시절 한량 대학생에게 순정을 바치고 싱글맘이 된 팡틴은 몽트레이유 여관에 딸 코제트를 맡기고 공장여공이 되어 매달 양육비를 송금하는데, 시기심이 많은 직장 동료와 반장의 농간으로 일자리를 잃고 매음굴로 떨어진다.

    이 시기 프랑스는 굶주림을 견디다못해 아이를 버리고 알콜 중독에 빠져드는 비참한 인생들이 만연했다.
    불결한 위생상태는 1831년 콜레라의 유행을불러왔고 열악한 민중들의 삶을 도탄으로 이끌었다.

    성공한 혁명의 공통적인 원인은 하나다.
    굶주림.

    1831년 프랑스 대표적 도시인 리옹에서 노동자 수천명이 가담한 폭동이 일어나는데, 루이 필립 왕정은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주의자들은 왕정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1832년. 나폴레옹의 부관 출신 국회의원이었고 민중의 편으로 평가받는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난다.
    그것이 1832년 6월봉기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87년 6월 항쟁을 떠올린다고 한다.

    바리케이트를 치기 위해 가정에서 던진 가구들은 87년 6월 광화문 일대의 사무실에서 지지의 표시로 화장지를 던지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영화에서는 6월 5일~6일에 있었던 이 봉기가 소규모로 진행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파리전역에 십수개의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고 이날만 800여명이 사망한 대규모 시위였다고 한다.

    하지만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시위대가 진압된 후 피바다가 된 거리를 닦는 여인들은 오늘 아침 나란히 누워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냐는 노래를 부른다.

    시위를 이끈 앙졸라를 비롯한 아베쎄 회원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나란히 놓여진 장면을 보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렸다.
    - 그래서 또다른 혹자는 이 영화를 보며 광주를 떠올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패배를 예감한 앙졸라는 정부군의 공격이 있기전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한다. 19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이 있던 날과 유사하지 않은가.

    뜬금없는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마리우스 역은 앙졸라 역의 이 배우가 했어야한다고 본다. -소설에서는 마리우스가 아주 잘~생긴 도련님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마리우스의 매력을 모르겠다.

    1832년 6월 봉기는 실패했다.
    그런데 꼭 실패라고 볼 수 있을까?
    역사는 길게 봐서 전진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다 서다, 가다 뒤로 가다를 반복하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1848년 2월 혁명을 상징하며 막을 내린다.

    빅토르 위고는 1832년 6월 5일. 봉기가 있던 곳에서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파리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6월 봉기에 스러져간 젊음을 가슴에 담아두고 16년에 걸친 집필 끝에 1852년 <레미제라블>을 출간한다.

    위고는 1848년 2월 혁명이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1851년 황제 즉위를 도모하는 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추방당한다. <레미제라블>은 벨기에와 영국령 섬에 머문 망명작가의 위치에서 씌여졌다. <레미제라블>소설에서 공화주의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작가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영화의 피날레곡은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이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지나가고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다시 자유롭게 살 것이다.”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화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코끼리 동상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또한 뮤지컬의 스토리가 뚝뚝 끊어지듯이 급하게 전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미제라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장발장과 자베르와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거론하지 못했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이 갤리선 끌듯 프랑스를 이끌어가고 있는 주역이라는 것을 말하고싶지 않았을까?

    소설속에서 그래도 안온한 삶을 산 이들의 이야기는 생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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